제목 [에세이] 그림 라디오 _ 5.헐렁한 바지로 무장한 원더우먼의 하루
작성자 김현정 (ip:)
  • 작성일 17.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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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라디오]5.헐렁한 바지로 무장한 원더우먼의 하루



내숭 : 원더우먼 다이어리 / Feign : Wonder Woman Diary



아침을 알리듯 새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눈부신 햇살과 향긋한 집 내음에 취해 슬며시 눈을 뜬다. 부드럽고 폭신한 침대와 이불,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가 보인다.
남편은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다. 이렇게 해맑은 아이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 집 한 켠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내가 작업하는 곳에 옹기종기 모여 지켜본다.

내 머릿속에 있는, 꿈꿔왔던 결혼생활이다.

분명 꿈꾸고 그리는 대로 삶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에 언제나 존재해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가족들의 모습이 가장 선명하게 그려진다.

어릴 때부터 나의 롤모델은 어머니와 언니였다. 세 살 터울인 언니는 나에게 3년 후 미래의 모습이었고, 어머니는 30년 후의 모습이었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와 언니의 존재는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타임머신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언니를 따라 미술을 시작하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미술을 전공으로 하는 언니는 미술을 시작한 나에게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인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의 미래를 점 쳐보기 위해 언니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성격도 외모도 닮은 듯 다른 듯한 언니의 일상은 항상 이렇게 시작된다.
쩌렁쩌렁한 아기 울음소리 알람… 배가 고파 서럽게 우는 소리에 눈을 뜬다. 두 아이의 지린 기저귀 냄새가 온 방을 진동한다. 내 사랑스러운 조카의 향기지만 생각보다 심하다.
시계를 본 언니의 안색이 어둡다…밤새 뒤척이는 아이를 돌보느라 선잠을 자다 보니 알람을 놓친 것 같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빠듯한 순간이 또 다가온 듯하다.

두 아이를 씻기고 옷을 입힌다. 한 손은 돌이 채 안된 둘째에게 젖병을 물리고 다른 손으로는 남편의 아침을 챙겨준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문밖으로 나가지도 못 했던 예전과는 다르다.
피부가 땅기는 느낌에 로션만 대강 바르고 머리를 질끈 묶는다. 물론 이 와중에도 로션은 꼼꼼히 바른다. 유치원 버스 시간에 혹여나 늦을까 조바심을 내며 첫째 아이와 실랑이를 한다.

첫째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그제야 한숨을 돌린다. 아이들 이유식을 만들고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지만 정작 어머니들의 밥은 남은 음식이다.
아이들 장난감에 밀려 언니의 그림도구들은 한편에 밀려있는 것은 물론이고, 예전 같지 않은 몸매에 울적해한다.
하지만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서툰 말솜씨로 사랑한다 말하고, 오늘 배운 노래까지 하게 되면 방금까지 걱정했던 몸매와 어질러진 집안 청소 따위는 잠시 접어둔다.

어쩌면 내가 꿈꿔오던 결혼 생활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정신 없이 우리 자매를 키웠을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 내 앞의 언니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별 차이가 없을 나의 미래지만 그래도 그림 도구를 어지럽히면 혼내야 되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해보고 또 한 번 피식 웃는다.

자신의 꿈도 잠시 서랍에 넣어두고 잘록한 핏 따위는 없이 헐렁한 바지로 무장한 채 온 집안을 누비고 다녀도 누구보다 아름답고 멋진 어머니와 언니에게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의 어머니들은 우리들의 진정한 원더우먼입니다.

김현정 작가는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전공.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내숭’이라는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주제를 한복과 함께 참신하게 표현해 한국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www.kimhyunjung.kr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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