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해상 한우리 | 붓끝으로 포착한 21세기 新 풍속도
현대해상 사보 매거진이 '풍속화가'로 불리는 김현정 화가를 인터뷰해, 한복을 입은 여인을 소재로 전통과 현대의 부조화를 그리는 '내숭 시리즈'와 미국 메트로폴리턴 뮤지엄 전시 등 해외 반응, 컬러링북 출간과 SNS 소통,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 계획을 다뤘다. 글 김경민, 사진 전문식(Day40 Studio).
전체 본문 보기
어여쁘게 치장한 여인의 자태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고고한 차림새로 패스트푸드를 먹는 앙큼함에 실소가 터진다. 다시 그림 앞에 서면 그림 속 풍경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임을 깨닫고 이내 통렬해지고 만다. '개인전 국내 최다 관객 달성'의 연유를 짐작하겠고, 미국 <포브스>지가 '2017년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30인'으로 지목한 이유에 동의하게 된다. 자신의 작품에서 걸어 나온 듯 우아한 한복을 차려입은 김현정 화가를 만났다.
한국인의 '내숭'에 세계가 반하다
초상화에서 여자가 주인공인 그림은 숫자로 따지면 초라하다. 사대부 집안의 여인이나 여염집 아내, 기생을 포함해 알려진 작품 수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화가 김현정은 드물고 귀한 여인의 초상만을 그린다. 그림 속 여인은 한복을 입고 스쿠터로 햄버거를 배달하거나 양손 가득 쇼핑을 하고, 야무진 자세로 보드를 타다가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곤한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묘사는 사실적이고 내용은 직설이 넘친다. 그 조합이 오묘하다. 우리 주변에 살고 있을 법한 이 여인을 '내숭녀'라 부르고, 김현정 화가를 '풍속화가', '한국화의 아이돌'이라고 부른다.
"내숭 시리즈는 한복을 입은 여인을 소재로 작업을 합니다.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었지만 이어폰을 꽂고 자전거를 타거나 책상에 발을 올린 채 태블릿을 조작합니다. 통념적인 예법이나 기대에 걸맞은 이미지가 아니죠. 현시점의 한국인의 모습이니까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한복을 입고 있는 인물의 행동들, 그리고 지니고 있는 소품들과의 대비가 주는 의외성입니다. 전통 의상과 현대의 일상이 공존하고 겉과 속이 다른 여인의 내숭이라는, 일종의 비상식 내지 아이러니를 통해 파격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들이 보기에 거북할 정도는 아니어서인지 많은 분이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김현정 화가의 그림 앞에서 통쾌함을 느꼈다면 사회 통념적 시선과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름을 알린 내숭 시리즈뿐 아니라 목욕탕, 찜질방, 네일 숍, 포장마차 등 21세기 가장 한국적인 공간들이 김현정 화가의 붓에 붙들려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메트로폴리턴 뮤지엄에서 전시할 때였어요. 맥도날드 오토바이를 타는 '내숭:나를 움직이는 당신'을 보고 한 외국인 관객이 저에게 '맥 드라이브 스루는 있지만 맥 딜리버리는 상상도 못했다!'라며 기발하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저도 한국의 배달 문화를 소개해주며 즐겁게 대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한복은 한국인에게도 그리 익숙지 않은데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을까 막연한 걱정도 했어요. 하지만 한국의 풍속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해외 전시를 통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직접 배우고 경험해 화폭으로 옮기다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던 여덟 살부터 지금까지, 김현정 화가는 그림으로 세상을 읽고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매일 그림을 그리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살아 있고, 또 행복하구나'라고 느끼죠. 그리고자 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직접 배우고 경험하는 걸 좋아해요. 얼마 전에는 스케이트보드를 배웠어요. 그때의 즐거웠던 느낌을 '내숭:마니아'라는 작품으로 표현했고요."
한국화 감상 기술
첫째 감상은 영혼의 떨림으로 느끼는 행위다. 마음을 비우고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사람의 마음으로 느껴라.
둘째 그림과의 적당한 거리는 그림의 대각선 길이의 1~1.5배가 적당하다.
셋째 옛사람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쓰기를 했다. 그러니 한국화를 볼 때는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시선을 흘려라.
작품 속 내숭녀는 겉과 속이 다르지만, 화가로서 김현정은 겉과 속이 같다. "화가로 살아보니 가난할 이유도, 불행할 필요도 없었다"고 직설하며 "예술가 하면 으레 떠오르는 단명, 가난, 괴짜 이미지는 사회 통념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실제로 그녀는 서울시를 비롯한 여러 기관이나 기업과 협업해 편의점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다. 24시간 전시장인 SNS를 활용해 작품 이름을 공모하는 등 팬들과의 소통 실력 또한 발군이다.
"내숭녀 컬러링북을 출판했어요. 직접 색칠한 컬러링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서 응모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응모작들을 보니 상상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작품이 많았어요. 사실 특정 누군가만 할 수 있는 것이 미술이나 예술은 아니잖아요. 미술이 사회와 호흡하기 위해서는 문턱을 더 낮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화가도 1인 창업가, 현실에 최선을 다한다
붓을 잡고 있는 손도 화가의 손이요, 휴대전화로 독자와 소통하는 손도 화가의 손이다. 김현정 화가는 스스로를 '1인 창업가'라고 정의한다. 실제로 솜사탕 판매 알바, 전단지 알바, 입시 학원 강사, 과외 선생님, 쇼핑몰 창업 등 경력이 화려하다. 현상의 본질을 잡아내는 눈이 밝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배우고 있는 제가 조언할 입장은 아니지만, 좌절감이나 무기력감에 빠진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상기시켜주고 싶은 말이 '현실에 최선을 다하자'란 거예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태도라 생각해요. 새해에도 다시 도전하고, 함께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꽃꽂이와 운동, 인터넷 쇼핑 재미에 폭 빠져 있다는 김현정 화가. 이루어놓은 업적이 탄탄하지만 행하고 싶은 계획은 더 많다.
"스킨스쿠버를 배워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제주 해녀를 그려보고 싶어요. K-Drama, K-POP 등 한국의 문화를 제 그림을 통해 세계에 널리 소개하고 싶고요. 많은 작가가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서를 담은 '한국화'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