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사람들 | 내숭의 민낯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월간 '법원사람들' 2020년 3월호가 한복을 소재로 현대인의 일상을 재치있게 그리는 김현정 작가를 인터뷰했다. '내숭 시리즈'의 탄생 배경과 한지 콜라주 기법, 내숭의 의미, 결혼을 주제로 한 개인전 등을 다뤘다. 글 노초롱, 사진 홍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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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숭의 민낯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고운 한복을 갖춰 입은 그림 속 여인들은 편한 자세로 라면이나 햄버거를 먹기도 하고, 휴대폰을 보며 몰입하거나 신나게 게임을 하는 등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아 보인다. 전통적인 한국화에 현대인들의 모습을 재치 있게 녹여 낸 김현정 화가의 작품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전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모델이 혹시 내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우리 일상과 닿아 있다. '내숭 시리즈'로 시작해 수많은 컬래버레이션 작업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는 김현정 화가를 만나 보았다.
글. 노초롱 + 사진. 홍승진
한복에 새로운 시각을 더한 작품
고궁이나 한옥마을 근처에 가면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명절이나 결혼식처럼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한복을 차려입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던 과거와는 달리 요즘 한복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일상 속에서 활보하는 중이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으레 자연스러운 하나의 이벤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여기, 김현정 화가가 그린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한복 또한 생각의 전환을 야기하며 흥미를 자아낸다.
"격식과 고상함을 상징하는 한복을 입고 일상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의 대비를 통해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복을 주요 모티브로 잡았습니다. 동시에 통념으로부터의 일탈이 주는 자유로움을 제시하고자 작품에서 한복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게 된 것이죠."
김현정 화가는 한국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한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한복의 선과 색감, 문양과 화려한 장신구를 좋아하는 취향은 타고난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한복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취향은 작품 속에서도 다양한 색채와 디자인으로 잘 드러나 있다.
"인물의 누드 위에 먹으로 염색한 얇은 한지를 콜라주 해서 인물의 속이 비치도록 한 것은 '감추려고 하지만, 네 속이 훤히 다 보인다'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기법으로 고안한 것입니다. 또한 한복을 입고 활동하다 보면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러한 옷감의 사각거림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거든요. 그러던 중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사람이 옷을 입듯이 그림 속 인물에게 한지를 덧붙여 옷을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여백이 많은 한국화의 특성상 수묵으로 화면을 구성하면 자칫 단조롭고 심심할 수 있는 부분을 콜라주를 통해서 속이 비치는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이 같은 기법은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는 긴장감과 재미를 더하고, 한복(특히 저고리)의 재질과 느낌을 잘 살려 준다.
현대인의 내숭을 마주하는 쾌감
현대인의 감추고자 하는 내면을 위트 있게 꼬집은 '내숭 시리즈'로 큰 반향을 일으킨 김현정 화가. 2013년 <내숭 이야기> 개인전 관람객 2만 5천여 명에 이어, 2016년 <내숭 놀이공원> 개인전은 7만여 명에 가까운 방문객이 다녀갔다. 또한 활발한 SNS 활동으로 16만여 명의 팔로워가 있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내숭 시리즈에 등장하는 재밌는 발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김현정 화가는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자화상이라고 답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았죠. 당신들은 어떠한가요? 라는 마음으로 주변 인물들의 겉과 속이 다른 상반된 행동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리다 보니 낯익은 제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반성을 하면서 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얽매였던 자신을 풀어내고,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내가 어떤 사람인가?' 혹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자문의 시간을 가졌다는 김현정 화가. 그는 그 시간들을 통해 <내숭 이야기>라는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포착해 그만의 시선으로 솔직하게 통념의 문제를 표현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작품을 보는 동시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숭의 사전적 의미는 '겉으로는 순한 체 하나 속으로는 엉큼함'인데, 제 작품에서 '내숭'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통념적 평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속마음과 다른 겉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모든 태도'를 이릅니다. 성별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보편적 욕구 즉, 자신의 모자란 부분을 감추고 좋은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데서 나타나는 흔한 '불일치'가 내숭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회의 통념에 따라 개인이 자아의 정체성을 양보하는 현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유쾌한 미술 작품
지난해 추석을 맞이해 <계란 한 판, 결혼할 나이> 전시를 진행한 김현정 화가는 이전에는 작품의 배경이 채워지지 않았는데, 결혼에 대한 생각을 그리면서 여백을 더욱 풍부하게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만큼 앞으로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갖게 된다면 더 다양한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한복 입은 여성을 통해 우리 주변과 일상에서의 모습들을 화폭에 담아내는 그는 무엇보다도 '유쾌함'을 반영하고자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화가마다 작품의 지향점이 달라요. 어떤 분은 무겁고 심오하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분은 담백하게 표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제 작품을 최대한 즐겁고 유쾌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해요.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미술 작품으로 위안을 받고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에 대한 시선이나 통념 등, 다소 추상적이면서도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려면 그런 유쾌한 요소가 더욱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작품의 구도와 이미지, 제목 그리고 전시의 구성에 이르기까지 유쾌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림을 보는 분들도 이런 유쾌함과 즐거움을 기반으로 개인의 정체성이나 자아를 투영시켜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신선하다", "재미있다"로 시작해 최근에는 "공감된다", "딱 내 이야기다"라는 감상평까지, 김현정 화가의 작품을 통해 사람들은 전보다 한국화를 가깝게 대하게 됐을뿐더러 한국화를 바라보는 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작품 전시 외에 기업, 기관들과 더불어 활발하게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면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그의 다음 터닝포인트는 어떤 작품일까.
"요즘은 명화 패러디 작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는 모나리자 자화상, 결혼 후 시리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는 모습 등 명화를 유쾌하게 패러디한 작품을 통해 여러분께 인사드릴 예정입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SNS를 통해 제안해 주시면 즐거운 마음으로 참고하겠습니다."
마치 그림 속 여인이 튀어나온 듯 솔직하고 발랄하게 인터뷰를 마친 김현정 화가. 그가 만들어낼 다음 작품은 또 얼마나 신선하고 유쾌할지, 아직 미완성된 작품들임에도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이유는 작품 속 인물들이 바로 현재를 사는 우리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의 내면과 민낯을 화폭에 고스란히 표현해 내는 그의 성장이 자못 기대되는 까닭이다.
내숭: 인스타야 인스타야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 2016 l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l 139 x 110cm
내숭: 떨림 / 2013 l 한지 위에 수묵과 담채, 콜라쥬 l 67.5 x 60cm
한국화가 김현정
21세기의 풍속화를 그리는 한국화가. 현대 여성의 세태에 풍자와 해학을 담아 재해석하고 한지 콜라주와 독특한 필치로 표현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풍속화는 대부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한국화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젊은 여성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예리하게 읽어낸 덕에 '한국화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