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 작가인터뷰_떠오르는 신세대, 내숭그리는 화가 김현정
대학내일 700호(2014년 6월 27일자) 커버스토리 '떠오르는 신세대(THE RISING GENERATION)' 코너에 실린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재학 시절 김현정 작가 인터뷰. 내숭을 소재로 한 자화상 연작과 개인전 '2014 내숭올림픽', 사진 촬영 후 한지를 오려 붙이는 독특한 작업 방식, 동양화와 경영학을 함께 전공하게 된 계기 등을 다뤘다. 글 김주리 학생리포터, 사진 이서영, 편집 조아라.
전체 본문 보기
내숭 그리는 화가
김.현.정
진홍빛 한복을 곱게 입고는, 택배 상자를 식탁 삼아 짜장면을 흡입한다. 한복에 스냅백을 매치하고선 '양갓집 규수 스웩'을 뽐내기도 한다. 한국화가 김현정의 그림 속 여자는 특별하다. 마치 내 속마음 속 내숭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녀는 내숭을 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숭올림픽'을 개최한다. 이만하면 내숭 전문가인데, 직접 만난 그녀는 솔직하고 또 솔직했다.
김주리 학생리포터 chhieut@naver.com
Photographer 이서영 Editor 조아라
그림 속 '내숭녀'가 작가 자신이라던데, 자화상을 그린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엔 제게 상처 준 사람들을 그렸어요. 앞에선 웃는 얼굴로 대하다가, 뒤에선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고상하게 차려입었지만, 속은 전혀 고상하지 않은 네 모습을 그려주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그리다 보니까, 저도 그 미운 사람들이랑 닮은 부분이 있더라고요. 제 마음속 미움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예요. 대단한 예술가들을 보면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리거든요. 저도 저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요.
작품을 보면 재미있어요. 한복을 입고 스파게티를 돌돌 말아 먹는다거나, 명품을 보고 눈을 반짝 빛내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죠? 제가 생각하는 내숭에는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가 있어요. "저 조금밖에 못 먹어요." 데이트할 때 이런 말 하면 내숭 떤다고 하죠. 썸남 앞에서 예쁜척하는 건 좁은 의미의 내숭이에요. 제 그림 속 내숭은 더 넓은 뜻이고요. 남의 눈 의식하느라 겉과 속이 달라지는 현대인을 포착하는 건데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해당돼요. 내숭 부리는 모습을 솔직하게 그리려 했고요.
'넓은 의미의 내숭'은 왜 생기는 거죠? 내숭은 '격식'과 '예의'의 다른 말이 아닐까요? 우리는 남들 눈을 의식하며 살아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나,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내숭이 돼요. 그러니까 내숭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저는 내숭을 떠는 제 모습을 솔직하게 그리고 싶었고요.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 시선을 못 느낀다면 모두 발가벗고 다닐 거예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작가님의 내숭 레벨은? 좁은 의미의 내숭 레벨은 높지 않아요. 저는 많이 먹거든요. 하지만 남의 눈을 의식한다는 부분에서 넓은 의미의 내숭 레벨은 굉장히 높을 거예요. 저는 시선에 예민한 사람이었고, 남들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작품을 시작했으니까요. 물론 누군가가 '넌 지금 그 시선에서 벗어났니?'라고 묻는다면, 아직도 다 벗어나진 못했다고 답할 거예요. 사실 조금은 얽매여 있거든요.
그림 속 내숭녀는 항상 한복을 입고 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고상한 옷은 한복이었어요. 넓고 풍성한 치마폭은 비밀스러운 공간이고, 치마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저는 이 치마 속을 훤히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업 방식이 독특해요. 먼저 사진을 찍은 뒤, 사진을 보고 한지를 붙여가며 새 그림을 만들던데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힘들지는 않아요. 사실 한지로 한복을 표현하는 게 특별한 작업 방식은 아니에요. 오히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게 제 그림의 강점이죠. 작업하기 전에 사진을 먼저 찍어요. 그리고 인물을 누드로 표현한 뒤, 그 위에 한지를 오려 붙이고요. 예를 들어 제 작품 '폼생폼사: 순정녀'에선 한복 차림에 가체 올리고 당구를 치는 여성이 나와요. 우선 당구장에서 한복 입고 한 컷, 민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입고 한 컷을 찍어요. 이렇게 두 컷을 오버랩하고 나서 작업을 시작하죠.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경영학도 동시에 전공했어요. 제가 성장해야 그림도 성장할 수 있어요. 작가의 삶은 그림에 고스란히 묻어나니까요. 잘 그리고 싶어서 공부도 열심히 해요. 예술을 하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미술을 하는 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작가는 왜 늘 배고플까요? 그래서 공부를 하면서 미술시장 현황을 제대로 알고 싶었고, 잘못된 점을 개선하려는 마음도 컸어요.
힘든 점은 없었어요? 물론 경영학 공부가 쉽지는 않았어요. 그림 작업과 공부는 정말 다르니까요. 한쪽 뇌만 써도 힘든데, 좌뇌 우뇌를 번갈아 쓰니까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그래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고, 학창 시절이 소중하게 남았어요.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사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주려고 그린다기보다는, 저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에요. 우울할 때 그림을 그리면 조금 해소가 되더라고요. 받으려고 선물하기보단, 그냥 마음을 주라는 말이 있잖아요. 제게 작품 활동은 어떤 성과를 내는 목적이라기보다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