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김현정 ARTIST Hyunjung KIM

보그 | 한복에세이 ㅣ 꽃밭에서 ㅣ 마법같이 다가온 한복

매체 보그 코리아(VOGUE KOREA) 구분 잡지·정기간행물 게재일 2022.10.01 기자/프로그램 김현정 한국화가 (에디터 김나랑) 관리코드 MI217

보그 코리아 2022년 10월호(통권 315호) 한복 특집 '꽃밭에서'에 실린 김현정 작가의 기고 에세이 '21세기 풍속화'(213~214쪽). 사촌 오빠 결혼식에 한복을 입겠다고 고집 피웠던 어린 시절 일화로 시작해, 한복을 입은 현대 여성을 그리는 '내숭' 연작이 21세기 풍속화로 불리게 된 배경과, 첫 개인전에서 치맛자락 여밈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한복을 제대로 공부하게 된 계기, 한복을 일상적으로 즐겨 입게 된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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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풍속화

스물한 살, 사촌 오빠의 결혼식에 한복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보통 한국에서는 가족 중 기혼자만 한복을 입는다. 이례적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내 엉뚱함을 응원해줬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집으로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하시면, 나는 한복을 입고 전통 부채와 노리개 등을 선물했는데, 그때 들은 ‘이쁘다’는 칭찬이 몸에 배어서 그랬지 싶다. 어쩌면 ‘우아함으로 주목받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을 한복으로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나는 한복을 입은 현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그리는 한국화가가 되었다. 그림 속 여인은 아름다운 한복을 입은 채 피자나 햄버거를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포켓볼을 친다. 현대인의 일상을 한복과 함께 표현한 일련의 작품이 옛 풍속화를 떠올리게 해서인지, ‘21세기의 풍속화가’라 불러주시는 분도 있다. 감사한 일이다.

‘내숭’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도 한복이 함께했다. 한복이 주는 고상함과 얌전함에 착안해, 한복을 입고 격식을 차리지 않은 일상을 그림으로써 현대인의 내숭(겉으로는 순해 보이나 속으로는 엉큼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 ‘내숭: 아차’에서 인물이 먹고 있는 라면과 스타벅스 커피, 명품 핸드백은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일상을 대변하는 사물이다. ‘전통과 격식’이라는 한복의 이미지와 ‘현대와 일상’이라는 사물의 이미지를 교차·대비시킴으로써 ‘내숭’의 속성을 환기한 것이다. 시대적으로 교차하지 않는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어우러지게 한 것은 ‘이럴 때는 이런 것을 해야 한다’거나 ‘이런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통념에 충격을 주고 싶어서다. 내숭은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는 작품 속 여인이 붓으로 그려진 몸 위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한지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표현했다.

한복은 나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조형 요소지만, 활동 초기에는 한복을 잘 몰라 곤란을 겪기도 했다. 2013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한 관람객이 질문했다. “작가님, 작품 속 여인이 기생처럼 치맛자락을 잡고 있는데요, 어떤 메타포가 있나요?” 질문 의도를 몰라 당황스러웠다. 알고 보니 일각에서는 한복의 치맛자락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왼쪽 자락이 오른쪽 자락을 덮은 채 오른쪽 엉덩이 뒤에서 여며지면 기생의 옷차림으로 여겼다. 다행히 내 그림이 잘못되지 않았고, 관람객도 뭔가 착각했는지 그런 질문을 던진 거였다. 그런데도 부끄러웠다. 내가 그리는 대상을 이렇게 몰라서는 안 된다. 그때부터였다. 한복은 그림 속에서 내 생활로 걸어 들어왔다. 외부 활동을 할 때는 반드시 한복을 입었다. 가까이할수록 한복을 알게 되고 작품에 진정성이 더해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전시, 강연, 홍보대사 활동 등을 할 때면 한복을 입는다. 기품 있는 한복은 어느 자리에서도 주목받는다. 한복 안에서 ‘내가 보호받고 있구나’라는 안도감도 느낀다.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인 모임이더라도 한복을 입고 가면 웃는 얼굴과 호의, 칭찬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복은 나를 빛내고 보호해주는 마법이다.

한국의 유명 한복 디자이너의 작품도 거의 한 번씩 입어봤다. 한복 단벌이었는데 10년 가까이 입다 보니 지금 옷장에는 50여 벌의 한복이 걸려 있다. 세상에 예쁜 한복이 많아서 생긴 결과다. 결코 사치의 결과가 아니라 강변하고 싶다.

오래도록 한복을 가까이하면서 그 장점도 기꺼이 즐기고 있다. 한복은 정자세로 오래 버텨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치마를 방패 삼아 책상다리를 하고 부은 다리를 쉬곤 한다. 한복의 넉넉한 치맛자락은 몸에 해방감도 주었다. 한복은 내 삶을 담백하게 만들었다. 나는 한복을 고를 때 계절감과 색감, 활동성만 고려한다. 추우면 두꺼운 한복, 더우면 모시 한복을 꺼내 입는다. 강연을 갈 때면 해당 기관의 BI, CI에 맞춘 색상을 고른다. 기동성 있게 움직이고 싶으면 치마 길이가 발목 위로 올라오는 생활한복을, 특별한 무대에 설 때는 드레스 한복을 입는 정도다. 그간 옷이 많아도 늘 입을 옷이 없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한복을 그릴수록 그 아름다움에 점점 더 빠지는 중이다. 한복은 하나의 패션이면서, 그 자체로 고유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구축한다. 그렇기에 내 그림의 한복은 보는 이의 눈길을 끌면서 작가의 메시지도 전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무엇보다 한복은 아름다운 선과 색상, 질감으로 우아하면서도 화려하다. 사실 우아함과 화려함은 공존하기 힘든데, 한복은 이뤄낸다. 한복의 힘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김현정 한국화가